대학2학년의 여름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츠쿠루는 대부분 죽는것만을 생각하며 살고있었다. 

그러는 사이 20세의 생일을 맞이했으나, 매해 돌아오는 그날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그런 날들, 

자신의 목숨을 끊는것은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조리있는것 같았다.

왜 거기에서 마지막 한발을 내딪지 못했는가, 이유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그때라면 생사를 두고 문턱을 넘나드는것은 날달걀을 하나 마시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었는데..


츠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험해보지 않았던 것은 혹은 죽음에의 생각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강렬하여, 

그에 어울리는 죽음의 수단의 구체적인 모습이 심중에 그려지지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거기서는 오히려 이차적인 문제였다. 만약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열었을 것이 분명하다.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자면 일상의 연속으로서.. 

그러나 행복인지 불행인지 그런 문을 가까운곳에서 발견하는 것을 그는 할수없었다.


그때 죽는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다자키 츠쿠루는 자주 생각한다. 

그랬다면 지금 여기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매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고, 리얼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리얼이 아니게 되버리는 것.

이 세계에 있어서 자신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있어 이 세계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것.


그러나 동시에 왜 자신이 그시기, 그렇게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죽음에 가까워질수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도 츠쿠루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지않다. 구체적인 계기는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에의 동경이 왜 그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갖고, 자신을 반년가까이 뒤덮고 있었던 것일까.

뒤덮다. 그렇다, 틀림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거대한 고래에 삼켜져 그 배속에서 살아가게된 

성서의 인물처럼, 츠쿠루는 죽음의 위장에 떨어져 어둡고 탁한 공기 안에서 날짜를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을 보낸것이다.


그는 그 시기를 몽유병자처럼, 혹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못한 사자(死者)처럼 살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이를 닭고, 손에 잡히는 옷을 걸치고, 전차를 타고 학교에 가고, 

클래스의 노트를 빌렸다. 강풍에 기습당한 사람이 가로등에 매달리듯이, 

그는 그저 눈앞에 있는 타임테이블을 쫓아 움직였다. 용건없는 한 누구와도 말도 섞지않고, 

혼자사는 방에 돌아가면 마루에 앉아, 벽에 기대에 죽음에 대해, 혹은 삶의 누락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그 앞에는 어두운 구덩이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지구의 중심까지 똑바로 통해있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단단한 구름이되어버린 소용돌이치는 공허함이요. 들리는 것은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이었다. 




시나몬 언니님을 위한 무라카미 하루키 - #001